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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순교 성지

favorite2403 2026. 1. 19. 20:02

순례의 길 위에서 만난 또 하나의 피의 증언

매괴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순례단은 다음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 자리한 죽산 순교성지였다. 충북 감곡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짧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차분해졌다. 성모 신심이 깊은 매괴성당을 떠나, 이제는 피의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땅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순례의 무게를 더했다. 죽산은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혹독한 심문과 고문 속에서도 하느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장소로, 한국 천주교 박해사의 아픈 흔적이 깊이 새겨진 곳이다.

이진터에서 잊은터로, 그리고 성지로

죽산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심문과 처형을 당한 곳이다. 이곳에서 희생되어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기록된 순교자만 24명에 이르며, 기록조차 남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 또한 적지 않았을 것으로 전해진다. 죽산은 지리적 조건상 삼남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고,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된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옛 이름은 이진터였다. 고려시대 몽골군이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곳으로, ‘오랑캐가 진을 쳤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병인박해 시기, 이곳은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신자들이 이진터로 끌려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하여 **‘잊은터’**라 불렀다. 이름 속에 담긴 공포와 체념은 당시 신앙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을 그대로 전한다.

임진왜란 이후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커진 죽산은 1595년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병인박해 당시 도호부사는 강력한 병사력을 바탕으로 신자 색출과 체포를 주도했다. 특히 죽산의 처형장은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큰길가에 자리하고 있어 행인의 왕래가 잦았다. 관헌은 일부러 공개된 장소에서 처형을 집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가톨릭 신앙을 뿌리 뽑고자 했다. 신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고, 그 침묵과 고백은 곧 순교의 피로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었던 이 땅은 마침내 기도와 기억의 성지로 변화되었다. 죽산 순교성지의 입구에 세워진 큰 문에는 ‘성역’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는 단순한 공간의 경계를 넘어, 속세에서 성스러운 기억의 장소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문을 지나면 넓은 잔디광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묵주기도의 길, 순교자 묘역, 십자가의 길이 차분히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공간은 박해 시대 신앙선조들이 걸었던 고통과 믿음의 여정을 오늘의 순례자들이 몸으로 묵상하도록 이끈다.

피의 기억 위에 세워진 기도의 자리

죽산 순교성지는 단순한 역사 유적지가 아니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았던 이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장소이다. 이진터에서 잊은터로 불리며 공포의 공간이 되었던 땅은, 이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기도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수난의 길을 기꺼이 걸었던 신앙선조들의 결단을 떠올리게 된다.

성지를 떠나며 마음속에 남은 것은 비극의 기억보다도,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증거했던 믿음의 깊이였다. 죽산 순교성지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묵묵히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순례의 다음 여정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