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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내 성가정 성지

favorite2403 2026. 1. 19. 22:22

순교의 기억이 살아 있는 땅, 단내로 가는 길

오늘의 순례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자리한 단내 성가정성지로 향한다. 이름은 소박하지만, 이곳에 깃든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내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로, 박해의 시대를 살아낸 신앙인들의 눈물과 결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땅이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성지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생명을 내어놓으면서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증언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단내 성가정성지

단내 성가정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그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조선 후기 이 일대는 ‘단천리 교우촌’이라 불리며 경기 남부 지역 천주교 신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신자들은 혈연과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을 지켜 나갔고, 외딴 시골 마을은 박해 속에서 신앙을 숨기고 이어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그러나 병인박해의 광풍은 이 작은 공동체를 피해 가지 않았다. 포졸들은 매봉 일대에 숨어 마을을 감시하며 신자들을 색출했고, 단내는 순식간에 체포와 공포의 공간으로 변했다. 지금은 고요한 성지이지만, 당시 이 땅은 하루하루가 생사를 가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단내 성가정성지는 바로 그 고통의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이다.

 정은 바오로와 단내의 순교자들

병인박해 당시, 포졸들의 주요 표적 가운데 한 사람은 정은 바오로였다.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체포를 피해 낮에는 마을 뒤편 검은바위 굴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어서야 내려와 잠을 자고 다시 산으로 오르는 생활을 이어갔다. 혹독한 겨울 추위와 노쇠한 몸은 그에게 가혹했지만, 그는 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정은 바오로가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던 날,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병든 작은할아버지를 홀로 보낼 수 없다며 자진하여 포졸들 앞에 나섰다. 그는 가족애와 신앙을 함께 짊어지고, 스스로 체포의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선고받았다. 손과 발을 나무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젖은 창 호지를 하나씩 붙여 숨을 막는 잔혹한 형벌 속에서도 이들은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며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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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남한산성 동문

밖 시구문을 통해 밖으로 던져졌다. 가족들은 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수습해 단내에 안장했으나, 정양묵 베드로의 시신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과 뒤섞여 끝내 찾지 못했다. 이 땅에는 이렇게 이름은 전해지되 유해를 찾지 못한 순교자의 아픔도 함께 남아 있다.

단내 순교성지는 정은 바오로 일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곳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가운데 다섯 분을 기념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이는 한석운 토마스로, 광주 일리, 오늘날의 의왕시 지역에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어 김만집 아구스티노는 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으로,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형 김성우 안토니오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끝에 1841년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셋째 형제 김문집 베드로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체포되어 남한산성에서 오랜 옥중 생활을 겪은 뒤 1858년경 석방되었다.

이들과 함께 체포된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김성후 암브로시오,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그리고 경희의 다섯째 아들 김교익 토마스 등 여섯 명이었다. 이 가운데 안면이 있던 포졸의 도움으로 김교익 토마스만이 생환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순교하였다.

살아남은 김교익 토마스는 사형이 집행된 뒤 매일같이 형장을 찾아다니며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는 김문집 베드로와 김선희 경희 등 세 사람의 시신을 찾아 김성우·김만집 형제의 무덤 곁에 안장하였다. 생환 이후의 삶마저도 순교자들의 신앙을 잇는 증언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사목 활동

단내와 같은 교우촌의 신앙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사목 활동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박해가 극심한 조선 땅에서 은밀하고도 치열한 사목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산길과 물길을 따라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고해성사와 세례를 베풀었고, 흩어진 신자들을 다시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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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사목은 단순히 성사를 집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박해 속에서 흔들리는 신자들에게 신앙의 중심을 붙들어 주는 존재였다. 밤을 틈타 이동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공동체를 격려하며 신앙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힘썼다. 단내와 같은 교우촌은 이러한 사목 활동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신앙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목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 끝에 새남터에서 순교함으로써, 사제이자 순교자로 한국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정은 바오로와 단내의 순교자들이 보여준 신앙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침묵의 증언이 남긴 신앙의 유산

단내 성가정성지는 한 사람의 순교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곳은 가문과 공동체, 그리고 세대를 넘어 이어진 신앙의 선택이 켜켜이 쌓인 땅이다.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의 순교, 김성우·김만집 형제와 수많은 신앙인들의 희생,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사목과 순교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보다 귀하게 여긴 믿음이었다. 단내 성지를 거닐며 마주하는 고요함 속에는, 말없이 신앙을 증거했던 이들의 숨결이 지금도 살아 있다. 이 땅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곳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뿌리를 다시 묻는 질문을 던지는 장소로 남아 있다.